가끔씩 노크 톸돜

8.국가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진보정치가 국가로 하여금 실현하게 하려는 선은 어떤 것인가? 진보주의자는 어떤 선을 실현하라고 국가에 요구하는가?


집단에는 양심이 없다. 이 문제를 들여다보는 데는 미국 기독교 신학자 라인흘트 니버의 견해가 도움이 된다. ... 개인으로서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봉사해야 하며 서로 간의 정의를 확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런데 인종적, 경제적, 국가적 집단으로서의 개인들은 스스로 그 힘이 명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한다. 개인과 국가는 도덕적 이상이 다르다.


집단이 크면 클수록 그 집단은 스스로를 이기적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될수록 그 집단은 더욱 효율적이고 강력해지며 어떠한 사회적 제재도 물리칠 수 있게 된다. 집단이 크면 클수록 공동의 지성과 목적에 도달하기 어려워지며, 불가피하게 순간적인 충동이나 직접적이고 무반성적인 목적과 연계를 맺게 된다.


니버는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라고 했다. ... 사회는 여러 면에서 어쩔 수 없이 도덕성이 높은 사람들이 결코 도덕적으로 승인하지 않을 방법, 예컨데 이기심, 반항, 강제력, 원한 등을 사용해서라도 종국적으로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을 얼마나 받는 것이 정의로운지, 국가는 어떻게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가?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할 경우, 국가는 그 결정을 어떤 방법으로 집행할 수 있을까?




정의가 무엇인지, 국가로 하여금 어떻게 정의를 실현하게 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려면 그 어떤 철학자의 위대한 저서보다 먼저 헌법을 읽는 게 유익하다.


그렇다면 헌법에 따라 모든 국민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 이 권리를 누리는 데는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 대한민국 국민, 인간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자유 그 자체가 정의는 아니다. 자유가 있다고 정의가 수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유 없이 수립할 수 있는 정의는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모든 권력이란 지식이나 부와 같은 개인의 사적 권력이 아니라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강제력을 국민에게 행사할 수 있는 국가 권력을 의미한다.


이 권력을 배분하는 원리는 경쟁이다.  


경제권력 또는 시장권력이라고 일컬어지는 소득과 부의 배분도 경쟁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부와 소득의 정의로운 배분문제를 다룬 헌법조항은 이렇게 단순하다. 이 조항들의 의미를 한마디로 줄이면, 아주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가 아니고는 국가가 간섭하거나 개입하지 않을 테니 저마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벌고 싶은 만큼 돈을 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소득과 부의 배분은 정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자기 책임 아래 전개하는 자유로운 경쟁이 만들어낸 소득과 부의 분배를 정의롭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 조건이란 무엇인가? 첫째, 모든 사람이 동등한 참여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 둘째,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 ... 셋째, 만인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동등한 주체로서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고  목격하는 시장의 자유경쟁은 과연 이런 조건이 충족된 가운데 벌어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자유시장의 경쟁을 통한 소득과 부의 배분은 이론적으로는 정의로울 수 있지만 실제 현실에서 정의로운 것은 결코 아니다. 시장은 정의를 실현하지 않는다.


소득과 부의 정의로운 분배를 실현하기 위해 헌법이 규정한 의무를 국가가 실제로 충실히 이행했던 것은 아니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그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법률과 제도를 만들지 않았고 경제적 과정에 민주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소득과 부의 분배는 정의롭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정의롭게 분배되어야 하는 것은 혜택만이 아니다. 부담도 정의롭게 분배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국가공동체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자유, 평등, 안전, 평화, 환경 등이다.


진보자유주의자는 어떤 가치 하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거나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는다. 진보자유주의는 모든 형태, 모든 종류의 절대주의를 거부한다. 자유, 복지, 안전, 평등, 평화, 환경 등 헌법이 규정한 사회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모두 평등한 지위를 가진다. 어떠한 우열관계나 종속관계도 인정하지 않는다.


진보정치의 목표는 국가로 하여금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게 하는 것이다. 특정한 가치 하나만을 추구하는 '절대주의'로는 국가로 하여금 정의를 수립하게 하지 못한다. 진보정치는 열정을 요구하지만 '광신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그것은 일당독재, 신정국가, 국가의 신격화 등 여러 형태의 전체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한마디로 줄여서, 진보정치에는 자유주의적 기풍과 철학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