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노크 톸돜

5.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인가


오로지 국가만이 국민에 대해서, 다른 국가에 대해서,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폭력을 행사한다. 고귀한 사랑의 감정일 수 있는 애국심 뒤에는 결코 사랑하기 어려운 야수가 숨어 있는 것이다.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에 대한 증오심 또는 혐오감이 그것이다. 애국심은 내가 속한 국가를 사랑하는 감정인 동시에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를 배척하는 감정이다. 국가는 때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전쟁과 학살이라는 끔찍한 참화 속으로 몰아간다. 다른 어떤 사랑의 감정도 이런 엄청난 악을 저지르도록 사람을 부추기지는 않는다.


피히테는 이렇게 주장했다. 민족과 조국은 세속의 영원성을 간직하고 보증하는 것으로서 보통 말하는 국가의 의미를 뛰어넘는다. 사회내부의 평화유지라는 국가의 역할은 조국애가 본래 바라는 것을 실현하는 발판에 불과하다. 조국애의 목적은 영원하고 신적인 것이 이 세상에서 더욱더 순수하고 완전하게 꽃피도록 하는 것이다. 조국애가 국가 자체를 지배하게 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연적 자유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가능한 한 좁게 제한하여 그 모든 충동을 획일적인 규칙에 종속하게 하고 이를 끊임없이 감시해야 한다.

피히테는 국가보다 민족을 중시했다. 일반적으로 민족을 규정하는 요인으로 인종, 혈통, 지형, 언어 등 여러 가지를 꼽는데 피히테는 그 가운데서 언어가 민족을 구성하는 핵심요소라고 믿었다.


교양계급과 민중의 문화적, 정신적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피히테는 강력하고 보편적인 국가교육을 처방했다. 독일 민족이 지역적, 계급적, 사회적 차이를 뛰어넘어 애국심으로 뭉친 하나의 국민이 되도록 하기 위해 만인에 대한 보편적 국가교육을 실시하자는 것이다. 소수의 교양계급만 교육을 받고, 국가의 기반인 대다수 민중은 거의 완전히 무시되어 맹목적 우연에 맡겨져 있는 교육현실을 그는 개탄했다.


피히테의 구상은 매우 강력하고 야심찼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어린이를 가정에서 떼어내어 교사들과 공동생활을 하게 하는 강제적 의무교육 도입이 그 핵심이었다.


그에게 국가는 단순한 국가가 아니라 영원성을 보증하는 세속의 신이었다. 이 세속의 신이 인간의 아들딸을 부모에게서 일시적으로 빼앗아 집단생활과 대중교육의 축복 속으로 집어넣는다. 어린이들은 여기서 살아 있는 언어로 애국심을 교육받아 국가의 목표와 자기 자신의 삶의 목표를 동일시하는 애국적 독일 국민으로 다시 태어난다.


태양아래 영원한 것이 없다는, 모든 것이 헛되고 또 헛된 이 세상에서,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영원성은 오로지 민족과 조국뿐인 것이다. 따라서 애국심은 단연, 인간이 지녀야 할 모든 감정 가운데 가장 고귀하다.


그런데 피히테의 세계에는 민족만 존재할 뿐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 국민 개개인은 삶의 주체가 아니라 민족 또는 국가의 구성원일 뿐이다. 밀이나 루소가 삶의 주인으로 올려 세웠던 공화국의 주권자, 존엄성을 가진 개인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개인은 자기 나름의 인생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자기만의 열정과 개성을 분출하면서 그 목표를 추구하는 삶의 주체가 아니다. 국가가 만든 획일적 규칙에 따라 민족의 영원성과 위대함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개인적 충동을 억제하면서, 국가가 제시한 목표를 자기 삶의 목표로 여기며 살아가는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애국심이라는 인위적이고 유해한 감정을 근절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애국심은 자기 국민만을 사랑하는 감정이다. ... 애국심은 모든 국가의 국민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국민들을 침략하고 학살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던 시절의 개념이다. ... 통신수단이 발달하고 산업이나 무역, 예술, 과학의 연계성이 커지면서 사람들은 서로서로 긴밀한 관련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이웃 국가의 침략이나 정복, 학살이라는 위협은 자취를 감추었다. 모든 국민들이 함께 평화 속에서 상호 협력의 원칙에 따라 상업적, 산업적, 예술적, 과학적 우호관계를 이루며 살고 있다.


톨스토이는 애국심이 인위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유해한 감정이라고 확신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인류가 겪는 병폐 가운데 많은 것들이 애국심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애국심을 조장해서는 안된다. 이성적 존재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애국심을 억누르고 근절시켜야 한다.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넣은 세계적 군비확장과 파멸적 전쟁은 바로 이 애국심에서 야기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도 애국심이 퇴행적, 시대착오적이고 유해하다는 주장에 대해서 사람들은 침묵하거나 왜곡으로 대응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들의 행위와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구분하지 않고 국가의 명령을 따르다가 목숨을 잃은 모든 사람들을 애국자로 예우한다. 호전적이고 맹목적인 애국심과 참되고 올바른 애국심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민족주의와 애국심이 광풍을 일으키던 그 시점에, 르낭은 민족창출의 근본적인 요소가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주장했다. 민족은 기억의 공동체가 아니라 망각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 르낭은 민족국가를 형성한 통일 과정은 항상 갑작스럽게 이루어졌고 언제나 대규모 살상과 전쟁을 동반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예컨대 프랑스 북부와 남부의 결합은 거의 한 세기 동안 계속되었던 몰살과 테러의 결과였다.


이러저러한 언어 안에 몰아넣기 전에, 인간은 무엇보다도 우선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라는 기본 원칙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프랑스 문화, 독일 문화, 이탈리아 문화 이전에 인류의 문화가 있다.


결국 민족이란 함께 귀속되어 공동의 삶을 계속해나가기를 원하는 민중의 의지일 뿐이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애국심은 국가에 대한 배타적 사랑의 감정이 아니다. 함께 귀속되어 살면서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 또는 목적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