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노크 톸돜

한국의 대학교에서 전기공학과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건축업계 영업직 테크를 타게 됐다.

영업이 적성에 맞았으면 또 모를까... 토목쪽 건설기계도, 영업쪽도 너무 안 맞아서

빠르게 갈아타기 위해 1년만에 회사를 관뒀지만, 경력이 애매하게 돼버렸다.

(열심히 민첩 찍고 마법사 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전기 설비, 설계 쪽으로 테크를 타기 위해 일본인들이 따는 자격증 공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안 하면 선택지가 줄어든다. 또 면접에서 뭐 하나라도 더 말하고 싶다.

 

대충 찾아보니, 내가 노려볼 만 한건...

・低圧電気取扱者(저압전기취급자?) :교육만 들으면 다 받음

・玉掛け(공장에서 크레인 작업 할 때 고리 거는 거):교육만 들으면 받음

사실 전기랑 관련없는 데 공장 형이 추천해줘서 뭐 공부안해도 되는 거니까.

・電気工事士 第2種 :찾아보니 전기 공사 관련 시험 중에 제일 기본이라는데 이

정도면 외국인이라도 어떻게 비벼볼 만 하지 않을까? 

나머지는 일단 요거 따고 나서 비벼봐야지 생각 중인데

・職長・安全衛生責任者

・電験三種

난이도가 있어보인다. 아직은 너무 먼 이야기 ㅠㅠ

 

 

그리고 민간자격증이지만 CAD 자격증이 있으면 설계 쪽으로도 나갈 수 있겠다 생각했다.

MOS는 뭐 전 세계 공용이니까 따놓으면 좋겠지.

나도 드디어 뭔가 취업전선에 뛰어든 느낌이다. 첫 회사 너무 쉽게 들어갔어...

 

중세 봉건제 사회 #2

 

 

 이 중에 중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계급은 영주 계급이다. 영주는 성의 주인으로서 성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에 해당하는 장원을 소유하고 있었다. 장원은 쉽게 말하면 영주의 사유지다. ... 장원은 직접적으로 영주의 영향권에 놓인 까닭에 장원에서 발생하는 모든 생산물은 영주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즉 장원은 영주의 생산수단이라 하겠다. ... 영주들은 자신의 방원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벽이 두껍고 높은 성이 있어야 적들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세 시대를 거친 사회는 성을 소유하게 되었다. ...

 

 

 ...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는 사회에서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국왕은 신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통치의 권한을 인정받은 존재였다. 그 권한을 성직자가 인정해주었고, 그 대가로 국왕은 성직자의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 그만큼 사회가 안정되고 견고했던 것이다. 이러한 안정적 사회가 가능했기에 중세는 천 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중세 후기가 되면 견고했던 사회적 분위기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첫 번째 원인은 상업의 발달에서 찾을 수 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부를 축적한 상인 계층이 등장헀다. 이들은 고대와 중세의 유일한 생산수단인 토지와 영토 그리고 장원을 이용하지 않고서도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지배층의 권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또 스스로도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했다.

 

 

 두 번째 원인은 공장의 발생에서 찾을 수 있다. 18세기가 되면서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했다. 증기기관은 물을 끓여서 발생한 수증기로 터빈을 움직여서 기계를 작동시켰다. 이러한 증기기관이 당시에 발전한 분업과 만난다. 분업은 한 명이 하던 복잡한 일을 여럿이 분담함으로써 일의 효율을 높이는 작업 방식이다. ... 작업이 분담되니 일은 단순해지고 빨라졌다. 이러한 분업이 증기기관과 만나 폭발적인 효율성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공장의 등장을 의미했다. 증기기관은 단순한 동작을 반복할 수 있었기에, ... 분업된 작업 단계 중 단순한 동작이 필요한 과정에 증기기관을 설치했다. ...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공장의 의미다. 공장은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많은 양의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즉 공장은 새로운 생산수단이다. ... 이렇게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을 `부르주아‘라고 부른다. 부르주아라는 뜻 자체가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부르주아는 다른 말로 자본가 계급, 시민 계급, 유산계급이라고도 부른다. ...

 

... 중세 후기의 시대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구권력과 신권력의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중세봉건제 사회#1

 중세 봉건제사회는 4세기부터 14세기 무렵까지 약 천 년 정도의 시기다. 중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고대 노예제사회 말기에 있었던, 역사적으로 매우 독특한 사건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약 400년 동안의 이야기다.・・・

 

・・・도대체 세기를 나누는 기준은 어떻게 정해진 것인가? 그것은 잘 알려진 대로 예수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의 탄생일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예수의 탄생을 1년으로, 1세기의 시작으로 결정한 것이다. 역사적 사료상으로 고려하면 1년이 정말 예수가 탄생한 때인지는 아직까지도 의심스럽다고 하며, 역사가들은 기원전 4년에서 기원후 6년 사이에 예수가 탄생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고 한다.・・・

・・・근대와 현대의 세계는 서구의 세계였던 것이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세계의 역사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당연히 서구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서구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문화와 종교의 뿌리를 알아야 한다.・・・

・・・서구 사회의 문화와 역사를 관통하는 근원적인 배경은 크게 두 가지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그것이다.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로마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역사적 사조로서, 우리가 그리스・로마 신화라고 하면 떠오르는 제우스나 아폴론 등의 다신의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다. 반면 헤브라이즘은 이스라엘 민족과 야훼나 여호와라고 불리는 유일신인 하나님과의 계약에 대한 역사적 흐름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교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말한다. 쉽게 정리하면 서구는 두 가지 문화를 뿌리로 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와 그리스도교.・・・

 ・・・어쨌거나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발생한 그리스도교는 세계적 제국인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유럽 전체로 그 영향력을 뻗어 나간다. 이렇게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다루어야 할 중세 봉건제사회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원시 공산사회를 지나 고대 노예제사회가 되면서 변화되었던 가장 큰 특징은 토지와 영토라는 생산수단이 왕에 의해서 독점되었고, 이로 인한 계급이 분화되고 정착되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지배자인 왕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신을 요청했다. 중세 봉건제사회가 되면 사회적 계급은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분화된다. 국왕과 노예 사이에 성직자, 영주, 귀족, 기사, 농노가 생긴다.

 

고대 노예제 사회

 

 

 사회는 계급으로 체계화되었다. 지배 계층으로 왕과 귀족이, 피지배 계층으로 평민과 노예가 구성되었다.

 

 토지, 영토가 생산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은 토지, 영토에서 모든 가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땅을 소유하고 있으니 땅에서 자라는 곡식은 모두 지배자의 것이 되었다.

 

 생산수단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원시 시대의 돌 조각은 생산수단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생산수단은 영토와 토지 혹은 대농장이나 근대에 나타날 공장 같은 것들이다. 혼자서 소유할 수는 있지만 혼자서 운영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즉 생산수단은 노동을 대신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특징을 갖는 것이다. 이는 대농장이나 공장도 마찬가지다. 생산수단은 소유자가 타인의 노동력을 이용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관계를 왜곡시킨다.

 

 

 '신'은 요청된다. 지배자는 신을 부른다. 신이 진짜로 응답을 하거나 말거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신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는 지배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지배자 자신이 부를 수 있는 '신'이라는 언어만 있으면 된다. 왜냐하면 신은 지배자가 사회를 지배할 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독단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자일수록, 그의 신앙은 절실하다.

 

 이렇게 고대 노예제사회는 종교를 통해 그 지배체계를 공고히 하며 막을 내린다. 고대 노예제사회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토지와 영토라는 생산수단을 지배자가 독점하고, 그 독점의 정당성을 종교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고대 노예제사회는 구체적으로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로마 등 정치와 종교가 일치했던 제정일치사회들을 말한다.

 

원시공산사회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공산사회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시 사회는 원시 공산사회라 부른다. '공산' 은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한다는 뜻이다.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구분해야 하는 것은, 부와 재산을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 바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으면 부는 계속해서 발생한다.

 

 

생산수단을 소유하면 생산물을 소유하게 되고, 그 생산물을 이용해서 권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일이다. 생산수단과 생산물은 단순한 물질이다. 그런데 그런 물질이 비물질적인 사회적 관계로서의 권력 관계를 발생시킨 것이다.

 

함께 일하고 동일하게 나누었던 평등한 관계는 생산수단의 발생과 함께 무너진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슬픈 일도 아니다. 사회 전체로 보면 생산량이 증가해서 풍요로워진 것이 아닌가? 판단은 잠시 뒤로 미루자. 우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생산수단과 생산물, 하나를 더 기억한다면, 생산수단과 생산물에 의해 발생하는 권력.

생산수단 그리고 자본주의의 특성

 

 

 우선 우리는 인류의 역사 전체를 다섯 가지 시대로 나누어서 살펴볼 것이다. 원시, 고대, 중세, 근대, 현대. 각각의 시대는 특성에 따라 일반적으로 불리는 이름이 있다. 원시 공산사회, 고대 노예제사회, 중세 봉건제 사회, 근대 자본주의, 현대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 다섯 단계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할 것이다. 원시, 고대, 중세, 근대를 묶어서 설명할 것이고, 다음으로 근대화 현대를 묶어서 설명할 것이다. 두 부분의 역사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원시부터 근대까지의 역사는 '생산수단'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알아볼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역사는 '누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지'에 따라 변화한다. 생산수단은 생산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수단이라고 일단 쉽게 생각하자.생산수단과 생산물을 합해서 '부'라고 하지만, 같은 '부'라도 생산물은 소비되는 반면에 생산수단은 끝없이 생산물을 생산해낼 수 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은 경제력을 가진 것이고, 경제력을 가진다는 것은 권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원시부터 근대까지를 누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지에 따라서 구분한다는 것은, 다시말해 원시부터 근대까지를 권력의 이동에 따라 구분하겠다는 의미다. 

 

 생산물은 생산수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물품들이다. 이런 물품을 '재화'와 '서비스'라고도 부른다. 눈에 보이는 물질이면 재화, 눈에 안 보이면 서비스.

 

 

 원시부터 근대까지의 역사를 움직이는 핵심 개념이 '생산수단'이라면, 다음으로 근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움직이는 핵심 개념은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자본주의가 태생적으로 갖는 모습으로서 '공급량이 언제나 수요량보다 많다'는 특성이다. 여기서의 공급은 시장에 생산물을 제공하는 것이고, 수요는 그런 생산물을 사려는 욕구나 행위를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공급량은 과다하지만 수요량은 공급량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것은 산업화를 통해 발전한 자본주의의 태생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직선적 시간관과 원형적 시간관

 

 

 시간.'시간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가장 많이 하는 대답은 '흘러가는것'이다. 흘러가는 것? 흘러가는 것은 액체다. 흐른다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일 뿐, 어디를 보아도 시간이 물결치며 흘러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시간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시간에 대한 첫 번째 관점은, 시간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하나의 방향을 가지고 전진해간다는 관점이다. 시간은 과거를 거쳐 현재를 지나 미래로 향한다. 그 방향은 변하지 않고 항상 일정하다. 이런 생각은 매우 상식적이다.

 

 시간은 앞으로만 나아가고 절대 뒤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시간의 불가역적 성질' 이라고 한다. 시간의 불가역적 성질은 시간에 대한 첫 번째관점의 토대가 된다. 시간에 대한 첫 번째 관점, 즉 시간이 하나의 방향으로 전진한다는 관점을 '직선적 시간관'이라고 한다.

 

 

 직선적 시간관에 대비되는 시간에 대한 두 번째 관점은, 시간이 순환한다는 관점이다.우리는 암묵적으로 같은 패턴으로 시간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다가오는 내일은 경험하지 않은 내일이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새로운 내일도 아닐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되돌아오길 반복할 것이라는 관점을 '원형적 시간관'이라고 한다.

 

 

 정리하자면, 시간에 대한 커다란 두 입장이 있다. 시간이 직선적이라는 입장과 시간이 원형적이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물론 제3의 입장도 가능하다. 시간은 순환하는 동시에 앞으로 전진한다는 절충적인 입장이 그것이다. 용수철 모양처럼 말이다.

 

 어쨌거나 시간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은 실제로 서양과 동양의 시간관을 형성했다. 직선적 시간관은 서양의 문화와 종교의 밑바탕이 되었고, 원형적 시간관은 동양의 문화와 종교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시간관의 차이는 역사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이어진다.

 

우선 직선적 시간관은 역사는 끝없이 발전해간다는 '진보적 역사관'을 낳는다. 진보적 역사관에서의 역사는 직선적 시간관처럼 과거로의 회귀를 인정하지 않는다. 역사는 과거를 지나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며, 그 나아감은 어제보다 변화된 오늘이고 오늘보다 변화된 내일이다.인류의 점진적 발전과 진보에 대한 낙관이 진보적 역사관의 틍징이며, 서구사상의 근간을 형성한다.

 

 원형적 시간관은 역사가 큰 틀에서 반복된다는 '순환적 역사관'을 낳는다. 순환적 역사관에서의 역사는 발전과 진보를 지속하지 않는다. 대신 발전과 퇴보를 반복한다. 이것이 동양적 역사관의 특징이다.

 

 두 가지 역사관 중 이제부터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설명하는 틀로 사용할 역사관은 진보적 역사관이다. 다시 말해서, 앞으로 우리가 알아볼 역사는 발생한 사건들의 단순 나열을 넘어,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전개되는 역사의 흐름이 될 것이다. 

8.국가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진보정치가 국가로 하여금 실현하게 하려는 선은 어떤 것인가? 진보주의자는 어떤 선을 실현하라고 국가에 요구하는가?


집단에는 양심이 없다. 이 문제를 들여다보는 데는 미국 기독교 신학자 라인흘트 니버의 견해가 도움이 된다. ... 개인으로서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봉사해야 하며 서로 간의 정의를 확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런데 인종적, 경제적, 국가적 집단으로서의 개인들은 스스로 그 힘이 명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한다. 개인과 국가는 도덕적 이상이 다르다.


집단이 크면 클수록 그 집단은 스스로를 이기적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될수록 그 집단은 더욱 효율적이고 강력해지며 어떠한 사회적 제재도 물리칠 수 있게 된다. 집단이 크면 클수록 공동의 지성과 목적에 도달하기 어려워지며, 불가피하게 순간적인 충동이나 직접적이고 무반성적인 목적과 연계를 맺게 된다.


니버는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라고 했다. ... 사회는 여러 면에서 어쩔 수 없이 도덕성이 높은 사람들이 결코 도덕적으로 승인하지 않을 방법, 예컨데 이기심, 반항, 강제력, 원한 등을 사용해서라도 종국적으로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을 얼마나 받는 것이 정의로운지, 국가는 어떻게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가?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할 경우, 국가는 그 결정을 어떤 방법으로 집행할 수 있을까?




정의가 무엇인지, 국가로 하여금 어떻게 정의를 실현하게 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려면 그 어떤 철학자의 위대한 저서보다 먼저 헌법을 읽는 게 유익하다.


그렇다면 헌법에 따라 모든 국민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 이 권리를 누리는 데는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 대한민국 국민, 인간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자유 그 자체가 정의는 아니다. 자유가 있다고 정의가 수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유 없이 수립할 수 있는 정의는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모든 권력이란 지식이나 부와 같은 개인의 사적 권력이 아니라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강제력을 국민에게 행사할 수 있는 국가 권력을 의미한다.


이 권력을 배분하는 원리는 경쟁이다.  


경제권력 또는 시장권력이라고 일컬어지는 소득과 부의 배분도 경쟁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부와 소득의 정의로운 배분문제를 다룬 헌법조항은 이렇게 단순하다. 이 조항들의 의미를 한마디로 줄이면, 아주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가 아니고는 국가가 간섭하거나 개입하지 않을 테니 저마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벌고 싶은 만큼 돈을 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소득과 부의 배분은 정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자기 책임 아래 전개하는 자유로운 경쟁이 만들어낸 소득과 부의 분배를 정의롭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 조건이란 무엇인가? 첫째, 모든 사람이 동등한 참여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 둘째,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 ... 셋째, 만인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동등한 주체로서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고  목격하는 시장의 자유경쟁은 과연 이런 조건이 충족된 가운데 벌어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자유시장의 경쟁을 통한 소득과 부의 배분은 이론적으로는 정의로울 수 있지만 실제 현실에서 정의로운 것은 결코 아니다. 시장은 정의를 실현하지 않는다.


소득과 부의 정의로운 분배를 실현하기 위해 헌법이 규정한 의무를 국가가 실제로 충실히 이행했던 것은 아니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그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법률과 제도를 만들지 않았고 경제적 과정에 민주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소득과 부의 분배는 정의롭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정의롭게 분배되어야 하는 것은 혜택만이 아니다. 부담도 정의롭게 분배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국가공동체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자유, 평등, 안전, 평화, 환경 등이다.


진보자유주의자는 어떤 가치 하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거나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는다. 진보자유주의는 모든 형태, 모든 종류의 절대주의를 거부한다. 자유, 복지, 안전, 평등, 평화, 환경 등 헌법이 규정한 사회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모두 평등한 지위를 가진다. 어떠한 우열관계나 종속관계도 인정하지 않는다.


진보정치의 목표는 국가로 하여금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게 하는 것이다. 특정한 가치 하나만을 추구하는 '절대주의'로는 국가로 하여금 정의를 수립하게 하지 못한다. 진보정치는 열정을 요구하지만 '광신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그것은 일당독재, 신정국가, 국가의 신격화 등 여러 형태의 전체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한마디로 줄여서, 진보정치에는 자유주의적 기풍과 철학이 필요하다.

     



7.진보정치란 무엇인가

진보는 보수와 어떻게 다르며, 진보정치는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고 하는 것인가?


베블런은 이렇게 표현했다. "인간이 만든 제도와 인간 특성에서 일어나는 진보는 최적의 사유습성이 자연선택되는 과정이다."


베블런에게 진보는 어떤 당위적 요구나 지향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와 삶의 방식, 사유습성의 실제적이고 불가피한 진화를 의미한다. 진보는 피할 수도 멈출 수도 없다는 것이다.


진보는 생활환경의 변화가 요구하는 새로운 사유습성과 생활방식, 그에 따르는 제도의 조정 필요성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려는 정신적 태도이며, 보수는 익숙한 것을 지키려 하다보니 변화를 거부하게 되는 태도를 말한다. 보수의 핵심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진화의 법칙을 인간의 제도에 적용하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틀렸다."고 해야 마땅하다. 현재의 제도는 과거의 지배적 사유습성을 체현하는 것이어서 오늘의 생활환경이 요구하는 최적의 대응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환경의 변화를 긴급한 상황으로 인식한 사람은 새로운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신속하게 받아들인다.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의 여집합이다. ... 환경의 변화에 의해 강요당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영원히 보수주의자로 살아갈 것이다. 보수주의는 특정한 계급의 독점적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다.


사유습성과 생활양식을 바꾸고 조정하는 작업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유한계급은 돈과 권력이 있기 때문에 이처럼 귀찮은 일을 하지 않아도 사는 데 별 지장이 없다. 어지간한 생활환경의 변화에는 압력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현존하는 제도와 지배적 생활양식은 모두 좋고, 옳고, 합당하고, 아름답다고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보수주의는 고상하고 품위 있으나 혁신은 천박하고 나쁘다.


그런데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한계급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하위 소득계층 유권자들이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한 나머지 혁신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보수적이다.


풍요로운 사람들은 오늘의 상황에 불만을 느낄 기회가 적어서 보수적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보수적인 것이다. 생활환경 변화에 적당한 압력을 느끼면서도 학습하고 사유할 여유가 있는 중산층이 가장 뚜렷한 진보주의 성향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고령층이 청년들보다 더 보수적인 현상도 마찬가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기존의 제도와 사유습성에 노출된 기간이 짧으며 지적 활동이 상대적으로 왕성하다. 기존의 사유습성에 대한 집착이 덜하고 그것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가 풍부하다. 반면 나이가 들수록 기존의 사유습성은 더욱 강력한 지속성을 지니며 그것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는 부족해진다. 사람 따라 정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보수적으로 변하는 것은 불가피한 생물학적 필연이다.


계급적 귀속은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이지만 유일한 변수는 아닌 것이다.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 보수주의는 생물학적 본능이고 진보주의는 목적의식적 지향이다. 보수가 구심력이라면 진보는 원심력이다. 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있기에 유지되고 발전한다. 진보주의자만 있는 사회는 안정성이 없을 것이다. ... 반면 보수주의자만 사는 세상에서는 혁신이 불가능할 것이다. ...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둘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김상봉 교수의 견해를 소개한다. 이것이 요즘에 본 것 중에 진보의 울타리를 가장 좁게 설정한 이론이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이 글을 쓴 시점의 김상봉 교수에게 진보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김상봉과 달리 매우 넓게 진보의 울타리를 친 사람은 오랜 세월 영국 정부의 외교 관련 기밀문서를 다루었던 역사가 에드워드 카가 아닐까 싶다. ... 진보는 어떤 자동적인 또는 불가피한 진행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을 의미한다.


카는 진보를 일으키는 근본적인 도전의 목표와 내용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결정된다고 보았다. 진보주의 운동의 목표와 내용은 밖에서 주어지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남곡에 따르면 진보는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해나가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것을 지향하는 게 진보주의이다.


나는 이남곡의 견해가 진보와 진보주의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적합한 '중용적'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진보는 특정한 사상이나 이론, 어떤 구체적 국가정책이나 제도에 대한 특정한 견해와 고정적으로 결합되지 않는다.


과연 정치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견해를 적절한 답변으로 채택한다. 베버는 정치를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으로 폭넓게 규정했다.


그러나 진보정치를 하려면 정치 그 자체를 의미 있는 활동으로 인정하는 진취적 국가론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나는 하버드대학교의 마이클 센델 교수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맨 마지막 문장에서 조심스럽게 펼친 견해에 공감한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되며 더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최선의 국가는 행복하고 잘나가는 국가이다. 그런데 훌륭한 행위를 하지 않고는 잘나갈 수 없으며, 개인이든 국가든 탁월하고 지혜롭지 않고서는 훌륭한 행위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선의 국가를 만들어 국가의 텔로스를 실현하는 길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종국적으로 시민 각자가 훌륭해지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국가, 선을 행하는 국가,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원했다. ... 자유주의 국가론은 목적론적 국가론과 큰 어려움 없이 결합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위대한 개인주의자' 소로였다. ... 그가 절실히 원했던 것은 '더 나은 정부'였으며, 더 나은 정부를 얻는 길로 나아가려면 각자가 자신이 존경할 만한 정부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로가 원했던 국가는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고 개인을 한 이웃으로 존경할 줄 아는 국가"였다.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려는 활동이다. 직접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줌으로써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진보정치의 목표여야 한다는 것이다. 

복지국가론은 철학 차원의 국가론이 아니다. 복지국가는 선을 행하는 국가의 한 형태, 또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의 조합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복지국가의 주요 기능은 세 가지이다. 첫째, 국가의 규제를 통해 일정한 수준에서 시민들을 경제적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둘째, 조세징수와 보조금 지급을 통해 소득을 재분배하는 일이다. 셋째, 시장가격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서비스와 공동장비를 국민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흔히 복지국가론이 진보주의자의 전유물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어느 국가론도 완전하게 배척하지는 않는다.


진보주의자만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복지국가론이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 또는 이데올로기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내세우게 되면 오히려 복지정책에 대한 국민의 호감과 수용성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6.혁명이냐 개량이냐

자유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길이며, 자유를 제약하는 모든 시도는 전체주의로 귀결된다는 극단적 이론을 펼친 철학자도 흔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하이에크였다.

포퍼는 전체주의를 혐오했지만, 하이에크는 전체주의를 두려워했다. 하이에크에게는 '겁에 질린 자유주의자'라는 이름이 어울릴 것이다.

하이에크가 신봉한 사회운영의 기본 원리는 자연발생적인 힘을 최대한 이용하고 강제력에 최소한으로만 의존하는 것이었다. ... 하이에크의 주장에 따르면 자연발생적인 힘의 핵심은 경쟁이다. 경쟁이 최대한 유익하게 작동하도록 의식적으로 사회체제를 만들어야 하며 수동적으로 제도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포퍼는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경험과 지식의 부족을 이유로 들어 사회혁명에 반대했지만 하이에크는 혁명의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 그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다. 사회혁명의 열정을 광신으로 간주했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사회를 계획하고자 하는 가장 열광적인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계획을 조금도 인내하지 못하는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된다. 성자와 같은 일편단심의 이상주의자와 미치광인 광신자의 거리는 단지 한 발짝에 불과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하이에크의 주장을 요약해보자. ... 가치의 척도는 각자의 정신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다른 일반적 가치척도는 없다. ... 한마디로 말해서 선악을 판단하는 도덕기준은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있으며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이야기다.

이상국가에서는 특정한 하나의 가치규범이나 목적체계가 사회와 사람을 완전히 지배한다. 그 가치가 평등이든 정의든 다른 무엇이든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는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이 숨을 쉴 수 없다.

그래서 전체주의 국가는 교육과 언론을 장악하고 통제한다. 국민을 세뇌하기 위해서다.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국가는 국민들의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고 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발본색원 할 수 있다. 결국 '사회계획'은 도덕뿐만 아니라 사상의 생명인 이성도 파괴한다는 것이다.

하이에크에게 자유는 더 높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자유는 그 자체로 가장 높은 정치적 이상이다. ... 시민사회와 개인의 삶에서 각자 최고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대상들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자유가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내적 평화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실용적 도구에 불과하다.


하이에크에게 중요한 것은 권력의 원천이 아니라 권력의 제한이다. 국민이 정당하게 선출한 권력이라 할지라도 법 앞의 평등을 넘어서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왜? 그런 시도는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모두 전체주의로 가는 첫걸음이 되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규칙이라도 만인에게 똑같이 적용되기만 한다면 나쁠 게 없다는 것이 하이에크의 주장이다.


자유와 경쟁이 필연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과를 미리 예견하고 특정인에게 이익이나 불이익을 주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 만약 미리 정해진 기준에 따라 부의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보장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의도적으로 누가 무엇을 가져야 하는지를 결정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경제 전체를 계획해야 한다. 경제 전체를 계획하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전체주의로 가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 주장이 옳다면 국가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경쟁이 최대한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일 하나뿐이다.

그는 자유라는 하나의 가치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라는 하나의 가치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와 정의나 평등이라는 단일가치가 지배하는 다른 전체주의 사회가 뭐 그리 다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하이에크는 더 좋은 사회로 가는 길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답은 국가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하이에크는 사람들이 사회를 움직이는 원천인 미덕을 존중하지도 실천하지도 않는 현실을 개탄했다. 독립심, 자조,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태도, 다수에 대항하여 자기의 소신을 지키는 각오, 이웃과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집단주의는 이런 미덕을 모두 파괴한다.

민주주의 문명국가가 걸어야 할 길은 하이에크의 길이 아니다. 전체주의를 피하려고 할 때 우리가 무엇보다 우선해서 선택하고 시도해야 하는 것은 포퍼의 길이다. 이 길이 열려 있는 곳에서 마르크스의 길이 열릴 가능성은 없다. 사회혁명의 문을 걸어 잠그고 싶다면 부지런히 점진적 개량을 시도해야 한다.